실론 티

1880년대 초반은 세이론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식민지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커피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 산업이 붕괴되자 경제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고지대의 플랜테이션은 헐값에 팔렸고, 콜롬보에서는 은행 인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인디고와 키니나 재배에 대한 필사적인 실험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플랜터 협회는 행정비용 삭감을 위한 공포에 찬 제안을 정부에 제출했지만, 다행히도 거부되었습니다. 식민지 전역에 공황 분위기가 퍼졌습니다.

그 무렵, 캔디딤불라 플랜테이션 지구가 만나는 언덕 지역에서, 외딴 스코틀랜드 출신의 플랜터 제임스 테일러는 자신의 커피 농장인 룰레콘데라의 도로변에 새로운 식물을 심어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물은 차(茶)였습니다. 1867년, 그는 이미 자신의 방갈로 베란다에서 첫 잎을 시들게 하며 인도의 아삼 지역에서 사용되던 제다법을 모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커피 녹병이 퍼졌을 때, 테일러는 룰레콘데라에 19에이커의 차밭을 조성했으며, 총 23파운드의 첫 소량을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곧 스리랑카 전역의 플랜터들이 룰레콘데라를 방문해 차 재배와 제조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세이론과 그 플랜테이션 산업은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2만 헥타르(30만 에이커)가 넘는 토지를 죽은 커피나무에서 정리하고 차로 다시 심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결국 완수되었습니다.

플랜터들의 용기는 셜록 홈즈의 창작자인 아서 코난 도일 경에 의해 찬양받았습니다. 그는 단편소설 「De Profundis」에서 “썩은 곰팡이 하나가 한 공동체를 수년간의 절망 속에서 상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이끌었다”고 묘사하며, “세이론의 차밭은 워털루의 사자상 못지않은 진정한 용기의 기념비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불과 10년 만에 세이론에는 옛 산업의 폐허 위에 새로운 플랜테이션 산업이 세워졌고, 식민지는 다시 번영을 되찾았습니다.

제임스 테일러는 세이론에서 차 재배에 성공한 첫 번째 플랜터였지만,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기록은 많지 않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차나무의 재배가 이미 1824년에 시도되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후, 국제 금융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인 모리스 웜스가 푸셀라와람보다에 있는 로스차일드 소유지에 중국산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는 수확물로 중국식 방식의 차를 만들었지만, 파운드당 5파운드의 높은 가격으로 인해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한 세대 후, 테일러가 길을 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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